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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의 기운이 숨 쉰다송정마을 말채나무
송정마을 말채나무

유성구 송정동은 논산 방면으로 4번 국도를 타고 가다 계룡시 신도안과 맞닿는 대전의 남서쪽 끝 마을이다. 대전시 유성구와 계룡시로 행정구역이 나뉘어져 있지만 과거 이 지역 주민들은 하나의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이웃사촌지간으로 생활했다.

송정동 벽화마을

송정마을회관 앞 공터에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세 그루와 유난히 왜소한 말채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송정마을은 ‘정도전의 말채나무’로 이름이 꽤 알려져 있다.

조선 개국 일등공신인 삼봉(三峰) 정도전(1342-1398)이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러 내려왔다가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말채찍을 꽃아 놓은 것이 말채나무로 소생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원래 말채나무는 오래전 말라죽고 지금의 나무를 새로 심었다고 한다. 이 일대가 한 때 도읍지로 거론됐던 신도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도전의 방문설은 듣는 이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수령이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나 수십 년 됨직한 말채나무를 1390년대 개국한 조선의 건국신화의 사료로 들이대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신하의 정치를 신조로 삼았던 정도전의 개국정신이나 정치철학을 되새겨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방문할만하다.

신도안 천도는 한양에 밀려 무산됐다. 공교롭게도 한양내 경복궁 자리를 놓고 정도전과 의견 차이를 보였던 무학대사(1327-1405)의 전설이 내려오는 ‘괴목정’이 정도전의 말채나무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1.8㎞ 떨어진 계룡시 신도안면 용정리 무궁화학습원에 자리 잡고 있다. 괴목정 역시 무학 대사가 도읍지를 살피러 내려와서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느티나무로 자랐다는 것이다. 송정마을의 느티나무처럼 괴목정의 느티나무도 세 그루이다.

정도전은 풍운아 같은 정치인이었다. 조선의 왕권과 제도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그는 세자 책봉을 놓고 앙심을 품은 이방원(1367-1422)에 의해 살해됐다. 그는 조선시대 내내 충절의 상징인 정몽주(1337-1392)에 밀려 변절자·처세가로 폄하되다가 조선말기인 고종대에 와서야 건국의 공을 인정받아 겨우 복권됐다. 해방 후 군사독재정권하에서도 정몽주와 정도전의 상반된 이미지는 좁혀지지 않았다. 최근에 와서야 정도전의 신권정치(臣權政治·재상 또는 신하 중심 정치)가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신도안 괴목정

조선의 건국신화는 유성과 신도안에서 1시간 거리인 대전 남단 만인산휴양림에 태조대왕태실까지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계룡산의 정기를 받은 도읍지의 기운은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김형규 기자  tjkhk@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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