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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교본부, 백일홍의 단아한 풍경 매료나라의 위기 때 만들어진 토속종교

 

자운대 안으로 들어가면 수운교본부 솔밭을 만난다. 이곳을 지나 샘물터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도솔천을 향해 발길을 옮겨보면 경내의 단아한 분위기와 말없는 산수의 풍경에 경건한 마음이 든다. 소박하게 꾸며진 정원을 걸어 정면에 있는 큰 문인 광덕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양쪽으로 두 그루의 백일홍을 만난다.

그리고 돌계단 위에 세워진 대전시 문화재 28호인 도솔천과 마주서게 되는데, 이 건물은 경복궁을 지은 최원식이 1929년에 건축한 것이어서 조선시대의 건축술을 가늠하게 해준다.

건축미는 보기에도 특별하다. 57평(188㎡) 규모의 도솔천 외벽에는 크고 작은 용들과 봉황이 조각되어 있고, 건물 안에는 복벽에 일월성신 조각, 동쪽에 금강탑, 서쪽에 무량수탑이 각각 목조 6층으로 금박되어 있다.

다음으로 도솔천 양 옆에는 특별한 돌이 있다. 이른바 석종. 개구리 모양의 자연석으로 된 이 돌은 신기하게도 돌로 두드리면 쇠북소리가 난다하여 석고(石鼓)라고도 한다.

수운교 문헌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수운교(水雲敎)는 동학시조 수운 최제우(崔濟愚) 천사(天師)께서 출룡자(出龍子)로 재위 출세하시어 수운강생 102(단기 4256, 서기 1923)년 계해10월15일 서울에서 개교(開敎)하였고, 1929년 현재의 대전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한다.

상식이지만 수운교와 같은 민족종교는 그 창도 시기가 우리의 역사상 가장 어렵고 불행했던 시대인 조선왕조 말엽에서 일제치하의 암흑기였다. 당시 국가와 종교가 역기능에 빠지고 민중들은 방향감각을 잃고 있을 때 민족과 인류의 앞날을 예시했고, 그에 맞춘 삶의 틀을 조판해 놓았으니 당시 민중들에게 민족종교는 희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운교 역시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에 의해 범종이 약탈되고, 수운교 폐지령으로 수운교의 의식은 물론 도솔천 간판까지 철거당했다. 천단 내부의 미타탑이 강제 반출되는 치욕과 함께 교인들이 모진 고문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다. 안으로는 신앙정신을 가다듬고 밖으로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정신을 더욱 고조시켜나간 이들이 또한 수운교도인이라고 전해지고 이다.

그렇지만 유성지역의 문화재에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수운교본부에 대한 지식을 갖기는 힘들다. 그저 나들이 나왔다가 잠시 둘러보거나, 등산 후 하산 길에 물 한 모금 마시는 곳 정도로 여기기 쉽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수운교는 우리 민족의 기상과 꿈을 담은 토속 종교로서 가치가 높다.

글/임재만

임재만  newsart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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