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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의병장 문석봉 선생유성장터 등 대전에서 3,000여명 만세운동 참여
최초 을미의병 일으킨 의병장 문석봉 선생

100년 전 3월 유성장터에 모인 민초들의 비장한 결의를 상상해본다.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태화관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촉발된 3.1운동은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대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동·유성·유천·치마(갈마)·회덕·산내·가수원·세천 등지에서 모두 19회에 걸쳐 연인원 3,000여명이 장터·거리로 뛰쳐나왔다.
지족리에 살던 이상수·권수 사촌형제는 3월 16일 유성장터에서 태극기를 상인들에게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300여명의 주민들이 동조했다. 형제는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각각 1년 2월의 형을 받았다.
3월27일과 4월1일에는 동구 인동장터에서 격렬한 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발포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유성장터 만세운동 재현

유성과 인접한 공주 유구 우시장과 정안장터에서도 3월과 4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은 주로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시장에서 일어났다. 선각자의 계시나 전철이 있었던 건 아닐까.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기 24년 전인 1895년 9월18일 유성장터. 300여명의 평민들이 보잘 것 없은 무기를 들고 울분을 토로하며 일본을 성토하고 있었다. 의병을 이끄는 관복차림의 건장한 사내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왜놈들에게 복수를 하자고 칼을 높이 치켜세웠다. 바로 일제에 항거한 의병의 효시인 문석봉(1851-1896)이었다. 경북 달성 출신의 문석봉은 무과출신으로 충남 진잠 현감을 지냈다. 1894년 11월에는 양호소모사에 임명돼 공주감영에서 일했다. 항일의지가 강해 일본군에 대적하기 위해 관군을 훈련시켰다는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인 1895년 8월 문석봉은 명성황후의 시해소식을 듣고 "천고에 없는 강상의 큰 일이 일어났다"고 통분했다. 국모의 복수를 위해 유성장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회덕현 무기고를 급습해 300여명의 의병을 무장시키고 10월 28일 공주를 향해 진격했다. 문석봉 의병은 공주 와야동(현재 소학동)에서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이 이끄는 군사와 일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문석봉은 체포돼 대구부에 구금됐다. 이듬해 봄 옥에서 탈출해 재봉기를 도모했지만 11월 19일 45세를 일기로 병사하고 말았다.

유성장터에 세워진 의병사적비

문석봉의 유성의병은 을미의병의 효시가 됐다. 한으로 남은 그의 항일의지는 후세들에게 전국의 장터에서 활활 타오른 3·1 운동 정신으로 되살아났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훈희 기자  golf@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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